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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원

지호인의 전시장은 진동한다. 어떻게?

당신은 우선 전시장을 둘러본다. 눈에 띄는 것은 자그마한 크기의 회화, 혹은 회화로 여겨지는 <비리디안 프레임과 캔버스색 페인팅>(2018). 그것의 표면을 이루는 폴리염화 비닐(PVC) 시트는 정적일 뿐이다. 단서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없는 것은 아니다. 전시장에 놓인 헤드폰을 쓰면 테크노와 비슷한 전자 음악이 들린다. 흘러나오는 것은 03>(2023). 신디사이저를 통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무거운 기계음과는 거리가 먼, 가볍고 날카로운 금속 소리의 전자 음악. 당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또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 단순한 후렴구라기보다, 심오한 요청에 가까운 외침. 소리는 강렬하지만, 이것만으로 진동을 느끼기에는 부족하다. 이 전자 음악은 저 회화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당신은 음악의 출처인, 위아래로 프레임을 달고서 회화인 양 행세하는 아이패드를 마주한다. 스크린은 로파이 걸(Lo-fi Girl) 풍의 비주얼라이저를 띄우고 있다. 그 속에는 캔버스 뒷면의 스트레처 구조로 상반신이 대체된 “프레임 인간”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것은, 아니 그 인간은 아마도 지금 음악을 듣고 있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헤드폰을 쓰고 있다. 로파이 걸이 헤드폰을 쓰고 일기를 쓰거나 키보드를 두드린다면, 프레임 인간은 헤드폰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네온 초록색의 물감으로. 그러다 문득, 에메랄드빛을 내는 PVC 시트가 당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아마도 지금 음악을 듣고 있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음악을 듣는 프레임 인간, 그리고 지금 이곳에 놓인 비리디안 프레임-캔버스와 네온 초록 회화. 이로써 단서는 포착되었다. 회화인 척하는 아이패드와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전자 음악. 그 음악과 함께 나타나는 비주얼라이저와 그것이 지시하는 PVC 시트, 그리고 또다시 비리디안 색이 가리키는 화면 속 회화. 회화와 음악의 반복과 재귀, 그들의 수상한 공모 혹은 공명. 그 공명이 지호인의 전시장에서 만들어지는 진동의 근원이다.

Painterly Electronic Body Music, 이른바 PEBM. 지호인이 그의 전자 음악에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회화적(painterly)’과 ‘일렉트로닉 바디 뮤직(EBM)’ 사이에 놓인 ‘ ‘이라는 공백은 그의 회화와 음악이 맺는 은밀한 협력 관계를 드러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공백은 둘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감춘다. 재료의 기능이 곧 작품 제목으로 대체된 PVC 회화나 00에서10에 이르는 간소한 숫자로 이름을 부여받은 PEBM 트랙처럼, 회화와 EBM 사이에 놓인 추상화된 여백은 그의 전자 음악이 회화의 재료나 기능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암시할 뿐이다. 지호인이 전시장에서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회화와 음악의 공명을 그 근원으로 하는 진동을 느끼기 위해서는 추상적으로 남겨진 ‘ ‘을 구상화해야 한다. 그의 회화와 전자 음악이 어떻게 연결되고(Painterly-EBM), 어긋나며(Painterly/EBM) 또 마침내 공명하게(Painterly*EBM) 되는지.

EBM은 1980년 초 벨기에와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한 음악 장르로, 포스트-펑크와 인더스트리얼의 요소를 댄스 음악과 결합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멜로디나 화음을 최소화하는 대신, 4/4 박자와 같은 반복적인 리듬과 강렬한 베이스-드럼 사운드를 주로 사용하는 EBM은 그 이름에 포함된 ‘바디'가 암시하듯, 본질적인 음악의 구조로 감상자에게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물리적 경험을 제공한다. 지호인의 PEBM 트랙 역시 초반에 제시되는 간소화된 사운드 샘플의 배열과 다른 샘플과의 중첩을 통해 진행된다. 이는 청자의 귀를 단순한 샘플과 리듬에 익숙해지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후반부에 만들어지는 복잡한 사운드는 이러한 익숙함을 배반하며, 청각적 자극을 처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신체를 압도하는 것과 같은 강렬한 신체적 경험을 낳는다.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EBM은 지호인의 회화와 연결된다. 지호인은 회화를 기술적 지지체로 고려하며, 그것이 만들어지고 감상되는 경험 전반에 얽힌 구조를 회화 작업의 주제 또는 재료로 삼아왔다. <비리디안 프레임과 캔버스색 페인팅>과 같은 작업은 2차원적 회화 평면을 가능하게 한 캔버스나 프레임, 그리고 평면 바깥의 벽면과 전시장 환경 등을 재귀적으로 치환한 결과물이다. 캡션에서 본래 쓰인 PVC 시트가 단순히 ‘캔버스’로 대체된 해당 작업은 그 표면에서 시각적 환영을 만들어 내는 대신, 투명한 시트와 폴리에스테르 프레임 너머로 회화 안과 바깥의 물리적 토대를 최대한으로 드러내며, 그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며 회화를 감상하는 관람자의 신체와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한다. 이러한 ‘회화적인’ 복합매체 또는 설치 작업은 지호인이 미니멀리즘을 직접적으로 참조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시각적 환영을 추구하던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에서 벗어나, 중성적이면서도 동시에 “특정한 오브제(Special Object)”로 거듭난 미니멀리즘은 작품 내적 관계 대신 작품 외적 관계를 중시한다. 미니멀리즘에 주로 등장하는 기하학적인 형태나 단순한 색의 반복은 작품의 구조와 본질을 직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전시된 공간의 구조나 조명 등과 조응하며, 관람자의 개입과 현전을 요구하고 작업의 일부로 삼는다. 지호인의 회화는 EBM과 마찬가지로 단순하고 간결한 회화적 구성물들의 배치와 반복을 통해 관람자의 시선을 초월하여 신체와 관계를 형성한다.

미니멀리즘에서 작품 그 자체와 의미의 일부로서 신체적 경험은 필연적으로 공간성뿐만 아니라 시간성이라는 차원에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그 시간성은 작품에 내재한 고정된 시간성이 아닌, 감상자의 움직임에 따라 작품의 형태가 활성화되고 의미가 발현되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시간성이다. 미니멀리즘이 만들어 내는 ‘특정한’ 시간성은 PEBM의 비선형적 시간성과 맞물린다. 기본적으로 음악은 소리를 매체로 하여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간의 직조를 통해 전개되는 예술이다. 이때 EBM과 같은 전자 음악은 전자적 조작을 통해 불규칙적인 주기와 패턴의 생성을 더욱 쉽게 한다. 지호인은 자신의 PEBM에서 서로 다른 샘플의 배열과 중첩을 통해 선형적 리듬의 규칙성을 해체하는 동시에 재구성하며 역동적인 시간성을 구현한다.

그러나 간과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지호인의 PEBM이 스피커를 통해 전시장에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헤드폰을 통해 감상자에게 직접 전달된다는 것이다. 미니멀리즘 작업이 형태로부터 비롯된 공간성과 관람자의 신체가 만들어 내는 시간성 모두를 지니고 있듯이, 음악 역시 공간과 매질을 경유해야 시간의 흐름으로서 전달될 수 있다. 특히 클럽이나 레이브에서 경험되는 바와 같이, 베이스-드럼 사운드를 극대화하고 공간 전체를 울리게 하는 사운드 시스템은 EBM을 비롯한 전자 음악에서 중요하게 논의되는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지호인이 PEBM을 재생하기 위한 수단으로 스피커 대신 헤드폰을 사용한다는 것은 곧 감상자의 몸을 매질로써, 그의 회화와 음악이 공명하는 지지체로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헤드폰을 통해 전달되는 PEBM은 듣는 이의 몸을 매개로 하여 회화적인 것과 전자 음악이 하나의 시공간을 구성하도록 한다.

지호인의 전시장에는 작품에 내재한 시간성도, 또 고정된 시간성도 없으며 오직 신체를 통해 진동하는 시공간이 있을 뿐이다. 지호인의 회화와 음악은 단순히 병치된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감상자의 몸이 경유하는 시간과 공간 축에서 융합된다. 이는 지호인이 회화의 기술적 지지체를 전자 음악을 만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트랙 정보에 나열된 알루미늄 프레임을 비롯한 나무 프레임, 붓과 페인팅 나이프, 가위 등의 재료는 PEBM 트랙의 직접적인 샘플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지호인이 미술용품점에서 직접 두드리며 채집한 소리는 녹음과 가공, 편집의 과정을 통해 회화적 지지체의 형태와 그것이 차지하는 공간을 시간 축으로 전개된다. 회화는 음악의 사운드 샘플이 되며, 음악은 회화의 형태와 공간을 재현한다. 당신의 몸은 회화의 예견과 음악의 회상이 일어나는 사건의 장소가 된다.

다시, 당신은 여전히 PEBM 트랙을 듣고 있거나 혹은 다시 듣기 위해 헤드폰을 쓴다. 이제 당신은 날카로운 금속 소리의 출처를 안다. 그것은 당신이 앞서 보았던 회화, 혹은 회화로 여겨지는 것을 만들기 위해 쓰인, 쓰였을지도 모르는, 또 쓰일지도 모르는 도구로부터 비롯된 소리다. 그러나 여전히 당신이 알아듣는, 혹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 또는 요청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매질로 존재하는 당신의 몸과 마찬가지로, 소리를 내던 그들의 신체가 존재했으며, 존재하며 또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할 뿐. 지지체가 된 당신은 지표에서 벗어나 현존을 포착한다. ‘회화적’과 ‘EBM’ 사이에 놓인 추상화된 ‘ ‘은 당신에게 촉구한다.

공명하라. 지호인의 전시장은 공백을 통해 당신을 추상됨의 세계로 안내한다. 최소한의 것으로 이루어진 추상됨의 세계에서 당신의 몸은 최대한의 진동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