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적 지지체의 회화적 문법

황재민

작가 지호인은 전시 <호버링>에 참여한 유일한 회화 작가였다. 전시를 기획한 두 명의 기획자(권시우, NNK(윤태웅))는 <호버링>이 90년대 출생 작가/기획자/디자이너 등등이 주체로서 부각되는 의미 있는 전시가 되길 원했고, 그렇기에 <호버링>은 흥미로운 풍경을 연출하며 인상 깊게 기억될 필요가 있었다. 하여 두 사람의 기획자는 전시된 작업을 서로 교차시키며 간섭하게 만들었는데, 작업이 이렇게 덩어리졌을 때 전시는 보다 동적인 광경을 연출하면서 개별 작업을 이렇게 저렇게 놓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시각적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획은 벽에 걸린 채 멈출 것을 전제로 하는 회화에게 확실히 불리한 방법이었고, 이 때문에 지호인은 자신의 회화를 전시가 진행된 2/W 공간 곳곳에 빠짐없이 걸어 최소한의 동적인 시각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호버링>은 기획이 작업과 대결하듯 힘을 쓰는 전시였고, 그 탓에 지호인의 설치는 기획에 대응하는 좋은 방법이 되었지만, 디스플레이의 결과 작가의 회화 자체보다 회화를 설치한 방법이 좀 더 돋보일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은 확실히 회화를 보여주는 완벽한 방법은 아니었다.

공간에 특정하게 조응하는 회화 설치는 작가가 <호버링>에 대응하려 발명한 임시적 방법이었지 지속해서 관심 가져왔던 주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지호인은 스스로를 ‘페인터 Painter’로 정체화하고, 전통적이고 모범적인 회화 제작의 방법론을 따라 창작한다고 주장하는 종류의 작가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은 이미 존재하는 회화 제작의 절차에 의지하면서도 늘 그 구조를 변용變容하려 들기 때문에 종종 흥미롭다. 작업의 이런 구조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호버링>이 막을 내린 이후 시도된 작가의 여러 작업을 전반적으로 훑어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데, 우선 다음에서는 <호버링>에 전시되었던 작가의 연작인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시리즈를 기획과는 무관하게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연작이 갖는 구조는 다음과 같다. 그림은 대개 25x25cm 크기의 정방형으로, 그리 크지 않다. 캔버스의 바탕천은 대체로 파란 색인데, 그 위에는 작은 체리 형상이 점점이 놓이고 그 주변으로 하얗거나 검은 색채의 붓질이 어우러진다. 캔버스의 크기가 아담하므로 붓질은 크게 휘둘리는 대신 짧은 리듬으로 툭 툭 놓이고, 어떤 붓질은 체리 형상의 뒤편에 놓이고 어떤 붓질은 앞으로 올라가므로 표면 내부에는 레이어 구조가 생겨난다.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은 하나의 회화가 가질 수 있는 여러 요소의 위계를 준자율적으로 조정하면서 탐구하는데, 이 방법이 바로 연작의 중심을 이룬다.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Proto. 2017. 캔버스, 24.2 × 24.2 cm.

이런 묘사를 통해 보면, 지호인의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연작의 구조는 여타 회화 작업의 구조와 크게 다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구조를 변용”하는 절차는 대체 어디에? 하지만 연작의 세부 요소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확실히 일반적 형태의 회화가 갖는 작업 방법론과는 다르다. 먼저 작가는 캔버스를 위한 바탕천으로 흔하게 쓰이는 린넨 등의 재료 대신 데님 원단을 사용한다. (바탕천이 파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손으로 그려진 듯 보였던 체리 형상은 사실 이 원단에 프린트된 패턴으로, 바탕천의 색과 형상에는 사실 작가가 개입한 바가 전혀 없다. 또한 캔버스 내부에 존재하는 붓질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좀 더 멀겋고 탁한 색을 띠는 붓질은 붓에 표백제를 바르고 데님 원단 캔버스에 입혀 색을 빼낸 결과물이고, 조금 더 또렷한 색과 형상을 갖는 붓질은 아크릴이나 유화 등의 물감 대신 젯소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회화가 만들어지는 일반적 논리에 따르면, 이것은 회화가 아니다. 프레임 내부에 볼만한 시각적 요소들이 와글와글 하더라도 회화 표면에 ‘올라간’ 요소는 전무하므로, 이것은 단지 서포트 Support에 불과하다. 지호인은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연작에서 재료를 표기하는 캡션을 단지 ‘캔버스’라고만 표기하는데, 이것은 무척 정직하지만 실은 트릭 플레이에 가깝다.

작가는 미술 대학에 입학하기 전 패션 브랜드에서 일했고 그 때문에 다양한 원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데, 그 경험으로부터 체리 패턴이 프린트된 이상한 원단을 회화의 바탕천으로 사용한다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체리 패턴의 데님 원단은 우스꽝스러운(귀여운) 프린트 탓에 슬프게도 기성복의 원단으로는 거의 활용되지 못했고, 체리라는 형상 역시 특정한 상징성을 지닐 수 있을 만큼 자주 사용되는 형상이 아니었기에, 소모된 재료가 아니었고 그 이유 때문에 미술의 재료로 끌고 들어오기에는 적합했다. 작업 초반, 작가는 회화 내부에 레이어 Layer 구조를 설정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는 표면 위로 물감을 쌓아 올려 적층시키는 방식으로 구현되는 대신 표면 아래로 레이어 구조를 침투시키는 방법으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표면 아래로 레이어 구조를 틈입하는 일은 어려워서,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이한 논리적 곡예가 필수적이었다.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연작에서, 두 종류의 붓질 중 하나인 표백제-붓질이 코팅된 데님 원단의 아교 층 아래로 파고들어 가 원단의 색소를 화학적으로 파괴하는 것으로 ‘캔버스 표면 내부의 붓질’을 이뤄냈다면, 젯소-붓질의 경우 원래 서포트를 만드는 일에 쓰이는 밑재료에게 본래 쓰임과는 다른 역할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이 붓질은 물리적으로는 원단 표면 위에서 무게를 더하고 있지만 사실 개념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작가가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연작을 작업하며 회화와 회화의 몸체로 간주되는 서포트 간의 관계를 보다 분명한 ‘회화’의 형태로 실험했다면, 이후 시도한 작업에서 작가는 서포트 자체의 외연을 확장하는 방법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한다. 이런 작업들은 <호버링> 이후 진행된 미발표 작업의 뼈대를 이루는데, 아직 시도되고 연습되고 있는 중인 이 작업은 시각적으로 보다 비-회화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회화이다.

이런 연작의 첫 번째 사례로, 지호인은 우선 서포트를 이루는 구성 요소 중 바탕천을 독립시킨다. 서포트의 일부를 단독으로 운용하는 과정은 서포트와 회화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심화했는데, 이는 회화의 존재론에 관해 묻는 개념적/형식적 탐구이기도 했지만 바탕천 자체의 매체성에 대한 실험이 되기도 했다. 이 작업을 위해서, 작가는 ‘체리’ 연작의 바탕천으로 사용한 체리 패턴의 데님 원단을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 전사용 특수 잉크로 프린트한 뒤 열프레스기로 찍어내어 승화전사하는 방법을 통해 준-DIY-아날로그 방식의 복제를 실험했다. 작가는 이 작업이 갖는 개념적 논리에 대해 ‘기생 지지체’라는 이름을 부여했는데, 이 ‘기생 지지체’ 실험에는 승화전사라는 매개 도구의 존재가 모종의 역할을 했다.

승화전사란 인쇄 기술과 염색 기술이 혼합된 형태의 디지털 인쇄 방식으로, 특수 컬러 전사 잉크가 160℃~220℃의 특정 고온 상태에서 액체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기화되어 전사 재료에 스며드는 방식의 날염 기법을 뜻한다. 폴리에스테르 원단 등의 열가소성 고분자 재료는 고온 상태에서 물리적 구조가 느슨해지는 특징이 있는데, 이 특징 때문에 승화전사의 재료로 통상 사용된다. 열프레스기를 이용해 재료와 잉크를 고온 상태로 만들면 열에 의해 기체 상태로 변한 전사 잉크의 염료가 느슨해진 피전사물의 구조로 스며드는데, 이후 재료를 식히는 과정에서 온도가 떨어지면 느슨해졌던 물리적 구조는 다시 단단해지고 염료는 기체에서 고체로 안정되며 이렇게 재료는 염색된다. 지호인은 승화전사 공정이 잉크를 기화시켜 기체 상태에서 원단을 염색한다는 특성에 착안, 승화전사 기법을 통해 복제되는 이미지를 ‘질량이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아있는 상태’라고 간주한다. ‘기생 지지체’라는 임의적 개념이 파생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인데, 작가는 ‘질량이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아있는’ 복제물의 상태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우선 작업의 주제물이었던 ‘서포트’를 문자로 재-개념화하는 과정을 거치기 시작한다. ‘Support’를 ‘sup/port’로 갈라보면 단어는 ‘섭’과 ‘포트’로 나뉘는데, 이때 ‘섭’을 ‘sub’으로 음차하면 ‘~의 아래에’라는 뜻이 도출되는 한 편 ‘port’는 항구나 항만, 혹은 접속구를 뜻하는 명사이므로; 전치사 ‘섭’이 명사 ‘포트’를 수식하는 관계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자의적으로 분할한 특정 형태소 간에 만들어지는 의존적 관계는 ‘서(섭)/포트’를 국문 번역한 결과인 ‘지지/체 支持/體’에 적용되었을 때 보다 뚜렷한 의미를 갖는데, 번역한 ‘지지체 支持體’ 시점에서 보았을 때 승화전사를 통해 복제한 ‘체리’ 연작의 바탕천 이미지에게는 ‘지지체 支持體’라는 명명이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질량이 사라진’ 상태이고, 그렇기 때문에 ‘체 體’가 부재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후 작가는 ‘체리’ 바탕천의 복제물을 ‘체’에 임시로 의지하는 ‘지지(물)’로 정의, 기생적 성격을 갖는다고 여긴 뒤 ‘기생 지지/체’라고 명명하고, 이때 언어적으로 형성된 기생적 관계는 작업에 존재하는 기생적 관계와 조응한다. 종종 ‘서포트 Support’의 번역어로 사용되는 ‘지지체’는 미술 비평가 로잘린드 크라우스 Rosalind Krauss의 개념인 ‘테크니컬 서포트 Technical Support’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서포트’가 통상 미술 대학의 실습실이나 작가의 작업실과 같은, ‘현장’에서 쓰이는 일상적 뉘앙스를 갖는 것에 비해 ‘지지체’는 학술지 논문과 같은 텍스트 속에서나 쓰일 것 같은 학제적 뉘앙스를 풍기고, 그러므로 ‘지지체’는 얼마간 ‘서포트’의 반쪽짜리 번역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지호인은 ‘서포트’를 ‘지지체’로 옮기는 과정에서 단어를 형태소 단위로 분절한 다음 의존/기생적 관계를 형성, 임의적 타당성을 부여하고, 이렇게 보면 ‘기생 지지/체’는 형식적으로 뿐 아니라 언어적으로 흥미로운 변주가 이루어진 셈이다. 또한 이것은 이렇게 되어 이런 저런 질문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어째서 ‘서포트’의 일상적 느낌을 감각적으로 살릴 수 있는 번역어는 파생되지 않았을까? 혹은, 지호인의 ‘기생 지지/체’ 작업은 ‘지지체’라는 학제적 개념을 자의적으로 차용해 사용함으로써 ‘기술적 지지체로서의 회화’라는 개념적 가능성을 환기할 수 있을까?

아무튼, 그렇다면 ‘질량이 사라진’ ‘이미지만 남은’ 이 작업물은 혹시 물리적 토대에 제한되지 않는 온전한 상태의 이미지라는, 불가능한 상태를 달성하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만 이런 이해에는 방해물이 있다. 복제의 재료가 되는 원본 데님 원단이 ‘체리’ 연작의 세계 속에서는 어디까지나 ‘지지체’, 회화 서포트의 역할을 담당하므로 아직 체리-세계 속에 있는 이 복제물 역시 표면 이미지가 아닌 (복제된) 서포트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원본 원단에 주름을 잡고 촬영/복제하여 ‘질량이 사라진’ 물체이자 이미지가 될 수 없는 ‘기생-지지(물)’에 물질성의 환영을 부여하는 등, 경계에 대한 실험을 가속한다. 이미지도 표면도 서포트도 그 어느 것도 될 수 없는 채로, ‘체’를 형성할 수 업는 무명의 무언가는 ‘지지’가 되어 회화의 물리적 몸체와 일반적 이해에 동시에 기생하는 결과물이 된다.

언급했듯, 작가는 미대 입학을 통해 ‘순수 미술’에 입문하기 전 패션 브랜드에서 오래 일했는데, 승화전사 기법의 사용 방법 역시 이 시기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었다. 지호인은 2018년 1월부터 ‘Moberm(모범잡화)’라는 이름의 소규모 잡화 브랜드를 론칭하여 몇 가지 굿즈와 의류를 제작해 판매했는데, ‘Moberm’을 위한 잡화를 만드는 일에도 승화전사는 큰 역할을 했다. 작가가 보다 관습적 형태의 ‘체리’인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연작을 제작하던 시기에는 잡화 제작(패션)과 회화 제작(미술)을 전혀 다른 계정의 활동으로 구분해두고 있었고, 그러므로 회화 작업에서는 승화전사 기법을 사용할 일이 없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미술 작업에도 승화전사 기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Moberm’과 ‘체리’가 형성하는 연결 지점은 혹시 없었을까? 작가는 ‘Moberm’과 회화 작업이 연관을 갖는 부분은 없었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GRE’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프로젝트를 살펴본다면 모종의 링크를 발견할 수 있다.

‘Painting’과 ‘Reproduction’의 합성어인 ‘GRE’는 “회화 제작의 방법론을 의류 프린팅의 방법론으로 치환해 비트는 모종의 형식과 태도가 잡화로 물화된 Moberm의 세컨드 브랜드”로서, 작가가 2017-18년의 활동에 “작별인사”를 보내며 잡화로서 제작한 티셔츠 굿즈와 작가적 자아를 가지고 제작했던 페인팅 작업 간의 교차점을 마련하고자 진행한 프로젝트다. 지호인은 ‘GRE’ 프로젝트의 진행을 위해 미술평론가 황재민을 협업자로 초빙, 티셔츠 위에 프린트로 재현할 만한 다섯 점의 역사적 회화를 골라오도록 했다. 이후 작가는 황재민에게 전사 잉크를 주고 다섯 점의 회화를 베껴 그리게 했고 그렇게 완성된 어설픈 그림을 승화전사 기법을 통해 빈 티셔츠 위로 복제했다. 이후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GRE: 프레임 인간을 위한 지지체 패션」이라는 제목의 원고로 마감되었고, 이 원고는 작가가 관여한 프로젝트 팀 ‘서울-모범-미감’의 책인 『S, KR 美感』에 수록되었다. 「GRE: 프레임 인간을 위한 지지체 패션」을 통해 지호인은 그간 구축한 회화적 논리를 잡화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작가는 ‘GRE’의 의의에 대하여 “GRE가 만든 지지체 패션은 자신을 프레임으로 정체화하는 이에겐 근사한 패션으로, 그렇지 않은 인간에겐 지지체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라고 설명하는데, 여기서는 잡화를 통해 인간을 회화화한다는 가상적 논리가 돋보인다. 나아가 만약 이 가상적 세계관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체리 패턴이 프린트된 데님 원단이 작가에 의해 재규정 되어 회화 서포트의 가능성을 지니게 된 것처럼 인간 역시 그렇게 재규정 되지 못할 이유가 딱히 없다. 이것은 불행한 인간 존재에게 보다 긍정적인 성격의 존재론적 가능성을 하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데, 작가의 말마따나 “인간의 수명보다 캔버스의 수명이 더 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또 “그림이 인간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림이 되기 위해서 인간을 그만두는 것은 “퍽 좋은 선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특정한 물질을 관습적 이해에 따라서 회화로 인식한다면 여기서는 물질이 인간을 회화로 인식한다. 작가가 회화 작업을 할 때 구축했던 작업적 논리, 회화 세계의 위계를 재조명하고 조정할 수 있도록 구축된 논리는 잡화라는 일상적 사물의 영역에 접합되며 해당 사물이 관계할 수 있는 세계상을 재배열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기생 지지체 커튼. 2018. 폴리에스테르 천에 승화전사, 커튼 봉, 76 × 90 cm,
기생 지지체와 액자 01. 2018. 폴리에스테르 천, 판지, 전사지에 승화전사, 프레임에 면천과 에폭시, 피그먼트, 42 × 32 cm.

작가는 현재 진행하고 있는 작업 중 흥미로운 것으로 커튼 작업을 꼽는다. 빈 커튼용 원단에 ‘체리’ 바탕천 이미지와 레이스 무늬 장식을 승화전사 복제한 이 작업은 유독 장식의 성격을 지니는 ‘기생 지지/체’ 작업인데,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커튼은 쉬포르-쉬르파스 Support-Surface의 ‘굿즈 버전 오마주’와 비슷한 것이다. 지호인은 이 작업을 통해 회화가 근거하는 개념적/물질적 토대를 의심하고 실험했던 쉬포르-쉬르파스의 실험을 기념하는 한편, ‘기생 지지/체’라는 작업적 방법론에 역사적 선례가 존재함을 환기하며 작업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기생 지지/체’와 관계하는 승화전사의 방법론이 레이스 장식을 두르고 세련되게 나아가는 동안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연작 역시 큰 변화를 겪었는데, 최근 작가는 체리 모양의 변형 캔버스 작업을 진행하고 그것은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연작 중 일부로 편입시켰다. 지지체의 일부가 되는 (비)형상을 확대하여 지지체의 물적 구조로 전치 해버린 이 작업은 사실 ‘셰이프드 캔버스 Shaped Canvas’라는 역사적 형식과 완벽하게 조응하는 형태는 아닌데, ‘셰이프드 캔버스’는 표면 내부의 구조를 외부 지지체가 수렴함으로써 ‘매체적 특정성 Medium Specificity’을 확보했던 형식으로, 이 논리에 근거하지 못한 변형 캔버스 작업은 그냥 시각적 장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의 변형 캔버스 작업에서, 캔버스 표면 위의 시각적 요소들은 마치 장래희망이 장식이라는 듯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지만, 체리 형상의 외부 구조는 사실 연작의 지지체인 체리로부터 도출된 것이고 그렇기에 이 작업의 내/외부 관계는 최소한의 정당성을 갖춘다. 지호인은 변형 캔버스 ‘체리’의 재료 캡션을 “캔버스에 유채”로 표기하는데, 작업의 어디를 보아도 유화 물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의아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전의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이 캡션 표기를 ‘캔버스’라고 마무리 지었듯이 이 또한 작가가 캡션을 통해 진행하는 유희이자 재료 실험의 일부로, “유채”의 출처를 묻자 작가는 작품에 사용한 마커 펜이 시중의 유채 물감과 같은 베이스를 사용한 제품이라고, ‘마커의 형태로 판매되는 유채 물감’에 다름 없다는 답신을 주었다.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13. 2018. 캔버스에 유채, 38.8 × 44.2 cm.

지호인은 회화를 회화로 성립할 수 있게 만드는 규칙에 대하여 엄격하고 그것을 따른다. 회화 캔버스를 제작할 때 뒷면에 남는 바탕천은 어떻게 접어서 처리해야 옳은지, 젯소와 물감은 서로 어떻게 다른지, 작가의 회화는 모범적 형태를 따르고 형식 실험은 그에 근거한다. 하지만 동시에, 지호인이 갖는 큰 관심사 중 하나는 회화 제작에 대안적 재료와 방법을 시도하는 일이다. 지호인은 미술 재료 중 보통 쓰이지 않는 것을 잘 찾아내어 작업에 적용하는데, 이것들은 고무 붓이나 유채 재료-베이스드 마커펜처럼 관습적으로 쓰이는 품목들은 아니지만 아슬아슬하게 ‘미술 재료’의 커트라인을 넘어서는 재료로, 따옴표를 쳐야 하는 ‘대안적 재료’ 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보통 대안적 재료는 회화 제작에 쓰일 때 기호가 되어버리지만, 지호인은 재료의 물질성에 관심을 갖고 그것이 보다 큰 규칙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게 될지 예측하며 주의를 기울이므로 작가의 ‘체리’에 ‘탈주’는 없는 셈이다. ‘체리’의 모험은 어디까지나 규칙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그 규칙은 작가 개인의 시점보다 크기 때문에, 작가의 작업은 회화와 그 제작의 규칙을 극복하는 일이 아니라 규칙을 지키는 일 안에서 말이 된다.

회화의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회화의 조건에 대해 실험한다는 생각은 재미있다. ‘극복의 대상으로서의 회화’라는, 회화의 역사적 역할을 없었던 것처럼 대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번역의 번역의 번역쯤을 거쳐 자기 것으로 사용 중인 ‘(기술적) 지지체’라는 개념에는 회피적인 뉘앙스가 배어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해당 개념이 변화한 미디어 환경 내의 미적 물건을 어떻게 미술적 ‘매체’로 미학화할 것인지 고민한 산물임과 동시에 ‘매체’ 개념을 특권화한 클레멘트 그린버그 Clement Greenberg의 ‘매체적 특정성’ 담론과는 거리를 둔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에 대한 보편적 이해가 희미해짐에 따라 관습이 주는 부하 역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현대성 Modernity은 ‘오늘’과 분리되었다. 오늘 시점에서 회화를 보는 일이 즐거운 것은 회화가 여전히 현대성의 상징물인 동시에 이런 분리를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동시대 미술 Contemporary Art’의 효용성 역시 끝이 난 오늘, 회화와 같은 ‘전통적’ 매체는 조형의 형태와 모양과 질감과 무게와 현상학적 존재감 따위에서 관람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고, 미술품 감상의 순수한 즐거움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슈를 문제적 담론의 일부로 끌어안아 벡터화했던 ‘동시대 미술’이 잃었던 가치 중 하나이기 때문에 보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도록 끌어당기는 회화의 인력은 오늘날 의미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해석은 회화를 한 철 유행이 지나간 뒤에도 꼿꼿하게 남아있는 무엇으로, ‘유행이 지난’ ‘혁명적 가능성의’ 매체쯤으로 낭만화하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갈 수도 있으므로 그리 훌륭하지 않다. 미적 물건이 미학화되는 기제는 항시 변화하며 ‘전통적’ 형태의 미적 매체 역시 당시의 미디어 환경이 변화함에 맞추어 이해의 전제가 조작되기 때문이다. 회화는 수정된 ‘미디엄’ 자체이고, 다른 차원의 ‘미디엄’이 인식되는 방식과 함께 인식될 수 있다. 표면은 회화를 대표하지 않고 다만 부분적인 요소로서 회화와 관계한다.

지호인의 ‘체리’는 2018년 1년 동안 관습적 형태의 회화에서 서포트 실험으로 나아가는 한 편, 티셔츠를 잠깐 거쳤다가 변형 캔버스 작업에 이르기까지, 바쁘게 변화했다. 이렇게 압축적인 변화는 심지어 착취적으로 보이는데, 작가의 ‘체리’ 착취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형태 변화의 가능성 역시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미적 매체의 노동량에 대한 제도적 규정은 아직 합의된 바가 없기 때문에 작가의 착취를 막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다. 그 결과 ‘체리’는 꾸준히 착취될 것이고, 작업은 다변화될 것인데, 매체의 자의적 규약이 갖는 비합리성은 이처럼 종종 인간 행위자의 규약에서 불가능한 지점을 실험하는 도구로서 의미를 갖곤 한다. 미술의 규약이 인간 세계의 규약과 크게 분리될 때 가능해지는 것들이 있는데, 이때 시점 역시 변화한다. 일반적 이해에 의거하여 축적된 역사의 보편적 위계가 사라진 세계에서 시점은 종종 세계를 매개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지호인의 ‘GRE’ 프로젝트가 보였듯이, ‘그건 그냥 티셔츠잖아요’와 ‘이것은 당신(프레임)을 회화로 변형하는 마법의 도구이고 거절은 여기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가 공존한다. 개인의 자의적 시점은 여전히 세계를 매개할 수 있는 도구지만, 우스운 것은 그 근거가 관계하는 개인의 인정에 달린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이 작가의 작업에서 시각적으로 응집되지 않는 듯 보인다는 사실은 ‘개념적 회화’가 흔히 갖는 단점 아닌 단점이지만, 한 편으로는 그것이 여기서 제일 중요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